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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1.1. 들어가기

번역은 인류 역사상 바벨탑 사건(구약성경 창세기 11장 1절에서 9절)이래 지금껏 수천 년 동안 인간의 의사소통을 위해 기여해 온 가장 중요한 분야이며 또 가장 오래된 직업 가운데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최정화, 2001) 그래서 우리에겐 전혀 생소하고 낯선 분야가 아니다. 그러나 번역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대략 2세기 전부터이며, 그나마 체계적인 사고가 시작된 것은 1960년대에 들어서고, 구체적인 학문 분야로 연구되기 시작한 것은 80년대부터인 지극히 신생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Hurtado, 2001) 이런 이유로 인해 번역 분야는 글로벌 시대를 맞이하여 나날이 발전하고 전문 인력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는 반면, 이를 연구하는 번역학에 대한 일반 인식은 저조하고 언어학 및 인접 학문과 혼동할 뿐 아니라 독립된 학문으로서 인정 받지 못하는 왜곡된 현실을 피할 수 없었다.

박용삼(2003)도 번역활동은 인류의 역사와 맞먹을 정도로 오래된 인간 활동이지만 이에 대한 역사나 이론의 정리는 매우 단편적인 것에 지나기 않기 때문에, 번역에 대한 연구 자체가 어려운 작업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도는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현대적인 학문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번역학은 처음에는 기존의 전통적인 철학과 언어학의 하위 분야로 분류된 바 있다. 50년대, 60년대, 70년대의 번역과 통역의 학문적인 연구는 전통적인 언어학의 교과 과정에서 정통성을 인정 받기 위한 각고의 노력으로 일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당시는 번역의 과정이 연구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주제라는 것을 학자들에게 설득하기가 어려웠다. 이런 맥락에서 그 동안 번역학의 목적은 번역은 단순히 언어를 읽는 복잡한 형태나 혹은 이중 언어 사용자의 기계적인 기술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었다. (Neubert, 1992)

하지만 최근 번역학은 발전을 거듭하면서 어느 한쪽에-예컨대 언어학-치우치거나 귀속되는 경향에서 벗어나, 다른 학문 분야와의 연계를 통한 학제적(學際的)인 새 연구 형태로 자리 매김 했다. 다시 말해 다른 학문과의 상호연계를 추구하기 시작한 것이며, 번역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번역의 각기 다른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나름대로의 연구를 계속하고 있는 것이 현재의 추세이다. (Neubert, 1992)

본 논문에서는 이러한 맥락에서 번역이라고 하는 현상, 특히 번역 과정에서 번역사의 이해와 재표현에 영향을 미치며 궁극적으로 번역의 품질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인 배경 지식에 관해 고찰해보고자 한다. 석사과정에서 통역과 번역을 전공했거나, 동 분야에서 번역사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번역을 잘하려면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가 배경지식이라는 것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을 것이며 또 그에 대해 스스로도 충분히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왜 중요한지, 또 번역 과정에서 어떤 영향을 미치며, 번역 결과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관해서는 이론적인 설명과 증명이 부재한 것이 사실이다. 본 논문은 이미 보편화된 이 가설(hypothesis)을 번역 과정의 분석을 통해 고찰해보고자 한다.

1. 2. 문제 제기

수 백년 전부터 번역사에게 불신을 부여해온 저 유명한 말장난 '번역은 반역이다(traduttore traditore)' 라는 말이 있다. (Wilss, 번역교육입문, 이기식, 김갑년 옮김, 2002) 이는 번역이 어려운 과제이며, 출발어 텍스트와 내용 및 형식에서 등가를 이루는 동일한 텍스트를 다른 언어 즉 도착어로 생산한다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시사하는 말일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노이베르트(Neubert, 1992)는 번역을 패러독스라고 했다. 너무나 오랫동안 문화적인 상호작용의 중요한 역할을 해온 것이 번역인 만큼, 번역 자체는 자연스런 반면에, 간혹 잘못된 번역문을 대할 때면 번역이 자연스럽지 못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번역은 필요 불가결한 것이지만, 번역을 정확하게 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게 여겨질 때가 종종 있다고 덧붙인다. 그러나 번역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느냐, 어떤 정의를 내리느냐에 따라 번역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에 대한 의견은 달라질 수 있다.

페르니에(Pergnier, 1993)는 번역을 '두 발화문의 표현적, 의미적 등가성을 획득하면서 한 언어로 발화된 것을 다른 언어로 발화된 것으로 만드는 것' 이라고 정리하고 있다. 즉 번역을 한다는 것은 언어 그 자체가 아니라 한 언어에서 발화된 '메시지'를 다른 언어에서 발화된 등가적인 '메시지'로 전환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서 소쉬르의 용어를 빌어 랑그가 아닌 빠롤을 번역하는 것이라고 덧붙인다.

박용삼(2003)은 사람들이 번역의 불가능성을 언급한다면, 그것은 랑그(langue)의 수준에서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런 의견을 강하게 뒷받침하고 있다. 모든 언어의 체계가 다르기 때문에 랑그의 수준에서 번역을 한다면 일대일 전환만 가능할 뿐 등가적인 번역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모든 텍스트는 실현된 언어, 즉 빠롤(parole)의 언어 내에서 문맥을 형성하며 그와 함께 언어 외적인 실제(사건; event)를 지시하고 화자의 호소기능도 포함하기 때문에, 번역사가 이 모든 것을 올바르게 이해했다면, 번역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라고 설명한다. 번역사는 텍스트가 주는 일차적인 문장들을 이해하기 위해 출발 언어의 문법적인 분석과 함께 문장을 이해하게 되고 또 그것이 지시하는 언어 외적인 사실을 파악하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시되는 것은 그 문장의 문법적인 분석과 문자 그대로의 의미(literal meanings), 또 그것이 지시하는 언어 외적인 사실을 통해서 얻은 지식이 그 문장을 포함하고 있는 텍스트에서는 다른 의미를 가지거나 또는 화용적인 의미(pragmatic meanings)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 번역사는 난관에 처하게 되며 잘못하면 출발어 텍스트 저자의 의도를 잘못 이해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도 있다. 특히 이런 문제는 그 출발 언어 텍스트를 포함하고 있는 문화를 이해하지 못할 때에도 자주 일어난다. 우리가 번역된 텍스트를 읽으면서, 표현이 자연스럽지 못하거나, 의미 파악이 잘 안 되거나, 지나치게 번역투의 느낌을 받을 경우, 이는 번역사가 출발어 텍스트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나머지 출발어 텍스트의 표현을 그대로 재현하여 일대일 대응을 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많다.

이에 대해 뷜스(Wilss, 1996)는 번역이란 언어적, 언어외적, 상황적(화용적) 지식을 바탕으로 하여 언어정보를 처리하는 특별한 형태이며, 번역사는 언제 어떤 지식이 필요할지 모르기 때문에 광범위한 지식을 축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야 자신의 번역작업에 중요한 출발어 텍스트 저자의 의식상태와 의식과정을 출발어 텍스트로부터 유추할 수 있다고 하면서 배경지식의 중요성을 강하게 부각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대로 번역은 이론보다는 실천의 영역에 속하는 행위인 만큼, 단순히 아는 것(know)이 아니라,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아는 것(know what to do)이다. (Hurtado, 2001)그렇다. 번역은 그저 아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을 활용하여 행위로 옮기는 실천적인 과정인 것이다. 따라서 언어에 대한 지식, 언어 외적 지식, 그리고 번역이라는 직접적인 행위를 통해 습득한 풍부한 경험이 없이는 제대로 된 번역을 해낼 수 없는, 그야말로 전문 기술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분야이다. 그런 만큼 이러한 제반 지식과 경험을 토대로 번역사가 번역행위를 해야 하는데, 이것을 사람들은 흔히 번역사의 직관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지식과 관련하여서도 번역사는 번역을 하면서 언어 내적인 의미와 언어 외적인 의미의 이해 과정에서 여러 가지 문제에 봉착한다. 이에 관해 크리스틴 뒤리외(Durieux, 2003)는 번역사가 문제에 봉착할 때, 번역사는 원문을 다시 읽고, 자신 앞에 놓인 문제의 성격에 따라 다양한 사고를 하게 되며, 어떤 식으로 해결책을 모색할지를 결정하고 나서, 언어사전이나 백과사전, 혹은 전문서적이나 잡지 등 번역사가 활용할 수 있는 수많은 자료들을 선택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이것은 배경지식을 풍부하게 제공하고 있는 중요한 자료들이다. 텍스트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표현할 지를 알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심도 깊은 자료 조사 뿐이다. 즉 배경지식을 동원하는 일이다. 이는 번역을 해본 사람은 누구나 다 경험했을 상식에 속하는 문제이다. 번역사가 해당 주제에 대해 잘 알고,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에 익숙할수록 번역사는 자연스러운 번역문을 생산할 수 있다. 번역사가 주제에 대해 잘 알수록, 그리고 해당분야에서 사용하는 전문용어에 친숙할수록 번역문의 가독성(readability)은 높아진다. (Durieux, 박시현.이향 번역, 고려대학교 출판사, 2003)

이처럼 번역은 단순한 작업이 아니라, 복잡한 과정을 거쳐 이루어지는 작업이며, 번역사의 직관에 의해 이루어지는 추상적인 작업이 아닌 철저한 지식을 바탕으로 한 지극히 과학적인 작업인 것이다.

이해의 과정을 거친 다음의 번역 과정은 실제 생산과 이어지는 재표현의 단계이다. 뷜스(Wilss, 1996)는 번역사가 출발어 문화에서 원래 텍스트가 가졌던 것과 같은 효과를 도착어 문화에서 얻으려면 제반지식을 바탕으로 한 재표현 작업을 전개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의 지식이란 언어적인 지식과 언어 외적인 세상 지식, 즉 배경지식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역동적인 등가성을 갖춘 이상적인 번역의 정의처럼 들린다. 이처럼 번역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작용하는 번역사의 지식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며, 또한 번역의 가능성을 증명하는 가장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II.

2. 1. 번역사의 이해 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무엇인가?

번역은 수용적이고 재생산적 차원에서 볼 때 출발어 텍스트를 도착어의 지식구조로 활성화한 결과이다. 즉 함축적이거나 명백한 번역사의 목표 하에서 출발어 텍스트 저자의 의도와 도착어 텍스트 독자의 기대를 고려하여 만들어진 지식 구조인 것이다. (Wilss, 1996) 특히 문서로 남는 번역의 경우에는 현장에서 원저자와의 의사소통이 어렵기 때문에 번역사의 기억에 들어있는 언어적, 비언어적 지식에 의존하여 번역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더구나 이 기억과 지식의 정도는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없으며, 이를 바탕으로 한 번역사의 이해과정 또한 도식적으로 검토할 수 없는 부분이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이런 이해과정에 객관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요소들을 살펴보기 위해 먼저 번역 과정을 분석해보고자 한다.

2. 2. 번역 과정 (the process of translation)

번역이란 앞서도 언급했듯이 출발어 텍스트로부터 가능한 한 등가의 도착어 텍스트로 이월해 가며, 텍스트 원본의 내용적 문체적 이해를 전제로 하는 텍스트 가공의 과정인 동시에 텍스트의 재언어화 과정이다. 이에 따라 번역행위는 그 자체적으로 분절된 과정이며, 이 과정은 두 가지 주요단계를 포함하는데, 그 하나는 번역사가 출발어 텍스트를 자신의 의미 의도와 문체 의도에 따라 분석하는 이해 단계이고, 다른 하나는 번역사가 의사소통상의 등가의 관점을 가장 적절히 고려해서 내용적으로나 문체적으로 분석된 출발어 텍스트를 도착어 텍스트로 재생산하는 언어적 재구성단계, 혹은 재표현 단계이다. (박용삼, 2003, Wilss, 1977) 이처럼 번역의 과정을 2단계로 정리하는 것은 가장 일반적인 관점이다.

이런 견해는 뒤리외(Durieux)에 의해서도 재확인된다. 그는 먼저 번역의 단계를 제 1단계인 이해의 단계로 구분한다. 이해의 과정은 우선 기호를 해독(decoding)하는 것에서 출발하여 인지적 보완소들을 동원하여 시니피에를 인식함으로써, 발화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고 텍스트의 역동성을 포착하는 단계로 이어지게 된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것이 제 2단계, 즉 번역사가 도착어로 도착어 텍스트를 생산하는 재표현의 단계이다. (Christine Durieux, 박시현.이향 번역, 고려대학교 출판사, 2003)

이것은 파리 ESIT에서 정리한 일반적인 번역의 과정이다. 셀레스코비치(Seleskovitch)와 르데르(Lederer)를 중심으로 한 ESIT의 해석학 이론에 의하면 번역은 1) 이해(comprehension), 2) 탈언어화(deverbalization), 3) 재표현(reexpression)의 3 단계로 나누고 있다.

그러나 카데 (Kade, 노이베르트, 1968에서 재인용)는 번역의 과정을 번역사의 관점 이라기 보다는 텍스트 생산의 기본 원리에 입각하여, 원 텍스트의 저자가 생산한 텍스트를 독자의 입장에서 수신한 다음, 또 다시 저자의 입장에서 재발신 및 재수신하는 과정으로 도식화하여 다음과 같이 그림으로 표시했다.

-> See the list of figures

위의 그림을 3단계로 나누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 발신자(sender)와 출발어텍스트의 수신자(receptor)인 번역사 사이의 의사소통 과정.

  2. 기호전환자(encoder)로서의 번역사가 수행하는 출발어에서 도착어로의 이행 과정

  3. 번역사(sender`)와 도착어에서의 수신자(receptor`) 사이의 의사소통 과정이다.

그러나 나이다(Nida, 1969)는 번역 과정을 분석과 종합 과정으로 보고 이를 다음과 같은 모형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번역사가 표층 구조 집합에서 다른 표층 구조 집합으로 직접 가지 않고, 실제로는 외관상 더 번거로운 우회, 즉 분석→ 전이→ 재구성, 이라는 과정을 거쳐서 마지막 단계에 이르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으로써 나이다는 역동적 등가성을 찾는 번역 과정을 강조하려고 했던 것 같다.

-> See the list of figures

그러나 이런 번역 과정은 어디까지나 도식적으로 기술할 수 있는 과정에 불과하다. 번역사가 번역 행위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번역사의 머리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결코 도식적으로 또 선형적으로 기술할 수 없는 복잡한 정보처리 과정이며, 정보처리의 심리학 영역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는 번역 과정을 일련의 단계적인 과정(cascaded process)과 각 단계별로 서로 작용하는 쌍방향의 단계(interactive process)로 구분하는 과정으로서, 앞서 설명한 번역 과정을 보다 입체적으로 분석한 것이다. (Bell, 1991) 즉 번역사는 출발어 텍스트를 입수하여 읽고 이해한 다음 도착어 텍스트로 재 표현하는 일련의 단계별 과정만을 거치는 것이 아니라, 각 단계별로 문장론적(syntactic), 의미론적(semantic), 화용론적(pragmatic) 분석(analysis)과 종합(synthesis)을 거듭하면서 다양한 층위에서의 이해와 전이와 재구성의 단계를 넘나든다. 노이베르트 역시 번역은 일종의 텍스트를 생산하는 종합적인 과정이며, 이 과정에서 번역사는 의미론, 구문론, 텍스트 및 화용론 분야를 역동적으로 매치 시켜 하나로 통합된 도착어 텍스트를 만들어내는 것이며, 도착어 텍스트는 번역 과정의 결과물이라고 설명하면서, 번역을 하나의 과정으로 보았다. 이러한 과정에 대한 결론은 제임스 홈즈(1988)의 유명한 Mapping theory에 관한 정의로 대신하고자 한다.

'번역 과정은 많은 단계를 거치는 과정이다. 문장을 번역하고 있는 동안, 번역사의 머릿속에서는 출발어 텍스트의 지도가 들어 있으며, 이와 동시에 자신이 도착어로 만들어내고자 하는 도착어 텍스트에 대한 지도가 들어 있다. 설사 연속적인 번역을 할 때에도 이런 구조적인 개념을 인식하고 있어서 번역해야 할 각 문장은 출발어 텍스트의 문장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출발어 텍스트의 지도와 도착어 텍스트의 지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본고에서는 읽기와 이해의 과정을 하나로 통합하여 제 1 단계, 재표현 과정을 생산 과정으로 한 제 2단계로 크게 구분한 다음, 각 단계별 이해와 표현의 과정에서 배경지식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2. 3. 번역 과정의 제 1 단계-읽기 및 텍스트 이해 과정-와 배경지식

우선 번역 과정에서 가장 먼저 시작되는 읽기(reading) 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읽기 단계에서부터 이미 번역사의 머리 속에서는 번역이 시작되고 있기 때문이다. 읽기는 텍스트가 어떤 형태로 되어 있는지 그리고 의미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전반적으로 알아볼 수 있는 이상적인 기반을 제공해준다. 텍스트 수용자인 번역사는 읽기를 하는 동안 텍스트를 보다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자신의 지식과 신념 및 가치 체계를 동원한다. 그러면서 등가와 번역 가능성에 대한 감을 잡는 것이다. (Hatim, 2001) 일반적인 독자들 역시 대개 읽기를 하는 동안 자신의 경험이나 세상 지식을 끌어내면서 읽고 있는 텍스트 이해에 필요한 정보를 동원한다. 물론 텍스트 종류에 따라 각기 다른 읽기 전략이 필요할 것이다. 이런 과정을 보그란데(고영근, 1999에서 재인용)는 읽기의 과정이란 독자가 제공하는 정보를 바탕으로 한 읽기에서 점차 텍스트가 제공하는 정보를 바탕으로 한 읽기로 이동하는 과정이다, 라고 정의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독자와 텍스트의 쌍방적인(interactive) 상호작용이 읽기 과정에서 반복적으로 계속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독자는 텍스트에 담겨있는 의미를 다양한 단계를 통해 선형적이 아닌 입체적으로 해석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일반적인 독자가 아니라 번역사의 입장에서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 아닐 수 없다. 자신의 경험이나 지식만을 바탕으로 한 이해는 자칫 주관적인 해석으로 흐를 우려가 있으며, 객관적이고 역동적인 등가성을 갖춘 도착어 텍스트를 생산하려면 텍스트가 제공하는 정보를 바탕으로 한 텍스트 이해와 해석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해야 하기 때문이다.(고영근, 1999) 그러므로 얼마나 객관적이고 정확한 읽기의 독자가 되느냐 하는 것이 번역사가 인지해야 할 또 하나의 도전일 것이다. 노르트(Nord)는 이 독자를 수용자로 표현하면서, 텍스트란 수용자에 의해 또 수용자를 위해 의미 있게 만들어진 것인 만큼, 텍스트에 의해 제공된 똑 같은 언어 자료에서도 수용자마다(혹은 같은 수용자일지라도 시간에 따라) 각각 다른 의미를 발견한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하나의 텍스트는 수용자의 수만큼이나 많은 텍스트가 된다는 것이다.(Nord, 1991) 이처럼 텍스트 읽기와 이해 과정이 지극히 주관적으로 흐를 수 있지만, 번역사의 입장에서 읽기의 과정은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즉 번역 작업의 기본 토양을 만들어주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본고에서는 이런 읽기의 과정을 이해의 과정으로 간주하여 보다 구체적으로 분석해보고자 한다. 번역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 바로 번역사의 이해 과정이기 때문이다. 우선 읽기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해의 과정을 기호를 해독하는 것에서 출발하여 인지적 보완소들을 동원하여 시니피에를 인식함으로써, 발화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고 텍스트의 역동성을 포착하는 단계로 이어지게 된다. (Durieux, 2003) 그러나 뒤리외는 이것은 어디까지나 이론적인 발상이며 실제 이해의 과정은 무지개의 색깔이 파장의 증가에 따라 단계적으로 달라지다가 스펙트럼에서 벗어나면 안 보이게 되듯이, 이해 단계간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고 설명한다. 이는 앞서 설명한 텍스트의 이해를 위해 읽기 과정에서 반복되는 쌍방적인 상호작용의 과정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는 견해이기도 하다. 텍스트의 난이도에 따라 혹은 번역사가 가지고 있는 지식의 정도에 따라 이런 과정이 수없이 되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번역사는 텍스트가 담고 있는 정보를 도출하고 더 나아가 텍스트의 논리를 도출하게 된다.

그렇다면 과연 번역사는 어떤 매개변수를 통해 텍스트의 이해에 도달하는가, 그리고 그러한 이해가 정당하다는 것은 어디에 토대를 두고 있는가?

번역사의 텍스트 이해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번역의 기본 단위이자 대상인 텍스트를 이해하는 과정을 일반적인 관점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텍스트의 이해는 문자를 바탕으로 텍스트의 내용(뜻)과 의미(속뜻)를 이해하는 활동이다. 텍스트의 내용은 문자를 통하여 접근이 가능하지만 의미는 또 다른 요소를 필요로 한다. 즉 텍스트의 의미는 내용에 대한 해석을 통해 접근할 수 있다. 이들 텍스트의 내용과 의미를 이해하는 활동을 독해(reading comprehension)라고 할 수 있다. 이 독해는 기호를 해독하여 텍스트의 내용을 파악하는 활동과 내용을 해석하여 의미를 찾아내는 과정, 그리고 텍스트의 의미를 독자(여기서는 번역사로 이해할 수 있다)가 마음 속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김도남, 2001) 다시 말해 독자는 읽는 과정에서 텍스트의 내용과 자신의 사전 지식, 그리고 다른 텍스트에서 읽었던 내용을 연결하여 텍스트의 내용을 인식하고 의미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누구나 어떤 주어진 텍스트를 접해 읽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러한 현상은 번역사가 번역할 텍스트를 읽고 이해하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로 일어난다.

읽기 과정에서 독자는 자신이 텍스트 밖의 세상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지식을 동원하여 텍스트에 나와 있지 않은 정보를 추가해 주제를 파악해낸다. 함축적인 의미(implicit meaning)가 문자로 표현된 의미(literal meaning)보다 훨씬 더 폭 넓은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지적 관점에서 본 읽기 과정의 분석에서 얻어지는 함축 의미를 살펴본 것이다. 이제는 수용 미학의 관점에서 살펴보자. 이는 언어의 화용적 차원과 의사 소통적 차원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번역을 포함한 모든 문학은 의사소통의 한 수단으로 보아야 하며, 그 중심에는 독자가 있다.

따라서 텍스트의 진정한 목표는 독자에 의해 수용되며, 텍스트는 독자에게 빌딩의 기본 틀, 즉 골격을 제공한다. 이 골격으로 건물을 짓는 것은 결국 독자이며, 독자는 자기 안에 저장된 텍스트 밖의 세상 지식과 전통이 제공하는 이전의 해석을 합하여 나름대로 그 골격을 채운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 김윤진(2000)은 사실상 우리는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거나 알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것을 번역할 수 있을 뿐이지, 전혀 모르는 것, 이해가 불가능한 것을 번역하지는 못한다. 설령 우리가 전혀 모르는 것을 번역할 수 있는 경우가 있더라도 그것은 텍스트의 독서가 진행됨에 따라 이해할 수 있는 성질의 것, 즉 우리가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잠재적 능력, 소위 선이해(先理解)의 틀을 이미 지니고 있을 경우에 한하는 것이다, 라고 하며 텍스트 이해의 사전 조건인 배경지식이라고 하는 본고의 주장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이런 식으로 번역사는 번역할 텍스트를 읽고 이해한 다음 이제 본격적으로 도착어 텍스트 생산 작업에 임하게 된다. 즉 자신이 읽고 이해한 출발어 텍스트를 도착어의 적절한 표현을 통해 재표현하는 단계로 이전하게 되는데, 이것이 기본적인 번역 과정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번역사의 읽기 과정과 이해의 과정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김윤진의 표현에 의하면 선이해의 틀, 혹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배경지식이란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배경지식은 단순히 읽기와 이해의 과정뿐 아니라, 그 다음 단계인 재표현의 단계에서도 번역사의 도착어 표현을 매끄럽고 자연스럽게 해주는 기본 열쇠가 되고 있다.

2. 4. 번역 과정의 제 2 단계-재표현 단계-와 배경 지식

자유자재로 표현한다는 말은 번역 작업에서 핵심적인 내용이다. 문장이 꼬인, 번역투가 물씬 풍기는 글만큼 읽기에 힘든 것도 없다. 번역사의 능숙한 표현력은 도착어의 가독성을 통해 드러난다. 번역사의 번역물은 읽히기 위한 것이다. 번역사는 주어진 텍스트를 다른 언어로 표현해 내는 것이 기본 임무이나, 그의 역할이 여기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번역사는 까다로운 번역투를 읽기 싫어하는 독자들이 그 글을 읽을 수 있게 만드는 사회적 책임도 지고 있다. 독자가 과연 자신이 번역한 것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을까, 독자를 출발어 텍스트에 보다 더 가깝게 접근시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도착어 텍스트를 읽게 될 독자층은 어떠한 지적 수준을 가지고 있을까 하는 질문들은 번역사 자신이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던지는 것들이며, 바로 그러한 독자에 대한 배려가 단어와 구문의 선택에 작용하게 마련이다. 그런 까닭에 번역사는 자신이 번역한 텍스트가 과연 어느 독자층을 겨냥하고 있는가를 예측하고 그와 동시에 그 독자층의 텍스트에 대한 기대 지평과 이해도를 번역의 방법론에 투영시키지 않을 수 없다. (김윤진, 2000) 이처럼 번역사가 독자층을 의식하며 도착어 표현과 문화에 상응하는 번역을 제대로 해내려면 해당 주제에 대해 충분히 인지한 다음, 해당 분야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용어나 표현들을 잘 파악하는 수밖에 없다.

재표현의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는 번역된 텍스트를 읽게 될 대상 독자층을 고려한 표현의 선택일 것이다. 번역은 어디까지나 의사소통을 그 기본 목적으로 삼고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면, 이 표현의 선택 문제는 번역 기술의 핵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도 출발어 텍스트의 이해가 충분하지 않을 경우, 자연스런 표현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최정화(2001)는 주제 지식의 결여, 도착어의 전문용어 인지 부족 등에 의해 장황한 번역물이 생산될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결국 번역사에게 배경 지식은 이해의 단계에서 뿐만 아니라 재 표현의 단계에서도 많은 영향을 끼치는 요소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III. 결론

모든 번역은 독자인 번역사에 의해 수행된 해석 작업의 결과이다. 그런 만큼 번역은 출발어 텍스트가 우리 앞에 펼치는 세상의 현실을 어떻게 바라보느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모든 번역사는 각기 다른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관점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번역사가 어떤 배경지식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주어진 텍스트를 이해하는 방식이 달라지며 또한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이 달라질 수 있다. 피상적으로 생각해왔던 배경지식을 번역 현상을 분석하고 이론적인 근거를 들어 그 역할과 중요성을 살펴본 것인데, 이는 단지 현상 분석과 그 현상에 대한 이론적인 증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번역 행위와 번역 교육에 있어서 정확한 방향을 설정하고, 그에 대한 설명 가능한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번역을 공부하는 학생과 전문 번역사는 물론이고 번역 교육에 종사하는 당사자들에게 스스로가 납득할 수 있는 배경지식에 대한 중요성을 다시 한번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특히 번역 교육 및 실제 작업 과정에서 막연하고 피상적인 접근 방식을 피하고 보다 구체적이고 명확한 방향을 설정하고, 번역 교육 현장에서 교육 내용의 우선 순위를 결정하는 데에도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할 것으로 기대 된다.